본문 바로가기

영화

기생충 : 계급 없는 사회의 계급갈등



1. 한국 사회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계급적 현실은 존재한다. 생산수단을 가지고 노동을 고용하는 사람이 소수 있는 반면 몸 외에는 가진 게 없어서 노동을 팔아야 하는 사람이 다수 존재하고 그들의 이해관계는 상당 정도 대립한다. 마르크스적 용어로 하면 즉자적 계급이 존재한다.

하지만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이 자본가와의 이해충돌을 의식하고 스스로를 조직하는 계급의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적 용어로 하면 대자적 계급은 없다.

한국에는 왜 계급의식이 존재하지 않는가.

1차적으로 남북 분단 때문이다.

해방공간에서는 남한에서도 사회주의가 제법 인기 높았다. 제헌헌법을 봐도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았다.

제헌헌법에의 제84조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하게 할 수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의 자유는 이 한계내에서 보장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서 좌파는 거의 박멸됐다. 좌파적 사상은 북조선 체제와 동일시 됐고, 집권 세력은 집권 세력에 대한 모든 반대를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농지개혁을 이끌었던 초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에 대한 사법 살인이 대표적이다.

1987년 민주 항쟁,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민주노도 운동을 중심으로 노동자 조직화가 이루어졌으나 오늘날 노동조합 조직률은 10%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노동조합에서 출발한 전통적 의미의 좌파 정당이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정치적 연계를 맺고 있는 정당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노동조합과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는 좌파 정당이 유력한 집권 후보 정당이다. 사회주의가 없는 '예외적 국가'인 미국에서도 노동조합은 지금까지도 미국 민주당의 가장 큰 파트너 중 하나다.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보라. 민주당 후보들이 선거에 나가기 전에 가장 먼저 어디를 찾는지. 노동조합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은 미국보다 더 예외적인 국가다.

두번째로 한국 사회가 빠르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7,80년대 거의 연평균 10% 성장했다. 열심히 공부하면, 열심히 노동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아버지보다 훨씬 더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릴 수 있었다.

여기서 코리안 드림이 자리 잡았다.

'노력하면 성공한다' '좋은 대학 가면 성공한다'

반대말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노력하지 않은 사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좋은 대학 가지 못한 사람'이 된다.

개인의 경제적 사정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 된 거다.

여기에 더해 과거제부터 이어져온 시험에 의해서 나누어지는 유사 사회 신분제, 군사 지도자 1인 집권으로 부추겨진 영웅사관 등은 소수의 엘리트들의 역할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다.

정주영, 이건희 등의 자본가들에 대한 동경, 경제발전을 가져온 지도자 박정희, 천재 1명이 1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엘리트주의는 한국 대중들의 무의식에 각인됐다.

조직에서의 지위의 상하를 인격적인 지배 간계의 상하로 받아들이는 한국의 문화 또한 계급의식을 가로막는 데 한몫했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라는 건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다. 부모가 어린 아이에게 손가락질 하며 "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돼"라고 말하는 대상일 뿐이다.

누군가가 자본가가 되기는 어렵지만 노력하면 누구나 E.O. 라이트적 의미에서 조직자산, 기술자산을 획득해 일정하게 지배를 하기도 하는 관리직, 전문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무런 자산이 없는 노동자가 된다는 건 노력을 안 했다는 증거, 사회적 실패자라는 증거가 된다.

당연히 계급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보다 못사는 사람은 나보다 노력을 안 한 사람이고, 나보다 잘사는 사람은 나보다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이다. 계급의식은 나보다 잘난 사람에 대한 열폭이 되기에 부끄러운 일이 되고, 나보다 못난 사람과 수준이 똑같이 지는 일이 되기에 짜증나는 일이 된다.

한국 사회에서 태어나 계급의식을 갖게 될 가능성은 굉장히 낮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에 홍세화가 많이 얘기하던 대로 '대학에서 선배 잘못 만났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실 이것도 굉장히 대졸자(특히 명문대) 중심주의적인 발언이긴 하다.)

2. 하지만 오늘날에는 무언가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면서 성장이 멈췄다. 2010년대 한국의 성장률은 2~3%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더이상 노력한다고 아버지 세대보다 생활 수준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게 눈에 보인다.

이제 그 전까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았던 계급적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부잣집 자식은 자산을 물려 받고, 좋은 학교에 진학해서 좋은 직장을 다니며 다시 부잣집 부모가 되고, 가난한 집 자식은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하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저소득 노동에 종사하며 다시 가난한 집 부모가 된다.

소위 '수저론'이다.

이제 대중들은 계급적 현실을 자각하고 계급의식을 강성한 걸까? 사실 그렇지 않다.

지금 언론에서 보도되는 내용들로 볼 때 대중들이 원하는 건 흙수저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자는 게 아니다.

다시 흙수저가 금수저가 될 수 있게 공정한 시험을 통해 대학에 진학하고, 회사에 입사하게 하자는 거다.

불평등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불평등은 정당하다. 단지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정당화하는 시스템을 공정하게 만들자는 거다.

2019년 대한민국의 화두는 '공정사회'였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이 조국 장관이 가진 사회자본을 활용해 명문대,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일은 전국민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금수저 집안의 자식이 불공정한 경쟁을 거쳐 금수저 집안의 부모로 재생산 되지 않도록 다시 시험을 객관식 위주로 '공정하게' 만들자는 게 가장 크게 드러난 여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급 의식은 드러날 수 없다. 내가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건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공부를 안 했고, 그래서 좋은 직업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계급적 현실은 존재하고, 대중들도 계급적 현실을 인지했지만, 계급적인 해결책을 원하지는 않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계급 갈등은 어떻게 표출될까?

<기생충> 영화는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3. 영화의 도입부에서 주인공 가족은 아무도 직업이 없다. 하지만 아무도 직업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이 가족의 구성원들은 생계를 위해 직업이 필요한 게 아니라 '좋은 직업'이 필요하고,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좋은 학벌'이 필요하다.

이들의 현실은 일자리도 없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중간계급이다.

(기택이 최소 개인 사업을 하는 쁘띠 부르주아 내지 조직자산이 있는 중간관리직에서 몰락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중간관리직이 회사를 그만두고 쁘띠 부르주아(치킨집 사장, 편의점 사장)가 됐다 몰락하는 루트는 흔하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로 아들 기우가 명문대생으로 위장해 자본가의 집에 위장 취업을 하게 된다. 자본가 집의 분위기를 파악한 기우는 아버지를 운전기사로, 어머니를 가정부로, 동생을 미술 치료 선생으로 취업시킨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다. 기우는 명문 대학생이 아니라 재수생이고, 기정은 시카고 유학파 미대생이 아니라 백수고, 아버지, 어머니도 별다른 경력이 없다.

영화 제목 그대로 그들은 기생충이다. 자본가가 뼈빠지게 일해서 번 돈을 빨아 먹고 사는 기생충.

기생충 가족의 대립 상대는 숙주인 자본가가 아니라 다른 기생충이다.

이전에 박사장네 집에서 기생하고 있던 국문광과 오근세의 비밀을 알게 되며 두 기생충 가족의 갈등은 격화된다. 없는 사람끼리 연대하자는 문광네 부부에게 기택네 가족은 '우린 반지하지만, 너넨 지하다'라고 말한다.

이런 노노 갈등은 한국 사회에서 익숙하다. 마치 도로공사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 너흰 명문대를 나오고, 필기 입사 시험을 보지 않았으니 정규직이 되면 안 된다고 비난하는 대졸 사무직들의 경우가 그렇다. 정리해고에서 노조와 회사측과의 협약으로 사내 식당 노동자를 하청노동자로 만드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근세가 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 것도 상징적이다. 현실은 지하 생활자지만 일을 하기보다는 신분 상승을 꿈꾸며 이미 폐지된 고시를 준비한다. 정신적으로 망가진 기우의 최종적인 해결책도 다시 명문대에 가서 성공하는 거다. 기우와 근세는 쌍둥이다.)

계급 연대는 없다. 우린 반지하라도 살 만큼 노력한 사람들이지만 너희는 그럴 자격도 없는 지하 생활자다.

박사장네 가족은 기택네 가족에게 이해 관계의 대립을 느끼는 게 아니라 아니라 그들을 고마운 사람 반, 멍청한 사람 반으로 여긴다.

그런 박사장과 기택의 갈등이 폭발하는 건 결국 박사장이 기택을 근세와 같은 수준으로 무시했기 때문이다.

박사장네 부르주아 가족은 기택네 식구들을 기본적으로 존중한다. 명문대생인 기우와 기정은 자신과 어느 정도 교류할 수 있는 예비 상류층이라고 생각해서 존중하며 대한다.

박사장은 기택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지만 선을 넘지 않을 것을 원한다. 교양 있는 사람으로서 피고용자를 존중은 하지만 당신과 나는 다른 계급의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거다.

박사장이 기택에게 예민한 건 냄새다. 기택은 높은 사람들만 모셨던 베테랑 운전사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사실 기택에게는 반지하 주민의 가난함의 냄새가 배어 있다. 이는 아무리 기택네 가족이 중산층을 흉내내려고 해도 흉내낼 수 없는 몸에 새겨진 가난의 표식이다.

박사장네 집에 숨어서 박사장이 기택의 '냄새'를 언급한 걸 기택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캐치하지 못했다.

그러다 지하실의 악령 근세가 지하실에서 올라와 자본가의 파티를 엉망으로 만들 떄 박사장이 외친 "냄새!"란 말에 기택은 그 의미를 깨닫는다.

박사장이 나를 무시했구나. 박사장이 나를 근세와 같은 지하 생활자 수준으로 무시했구나.

여기서 기택의 분노는 폭발한다.

박사장을 찌르는 기택은 온몸으로 "나는 룸펜이 아니야! 나는 중간 계급이라고!!!!!!!!!!!!!!!!!!!!!!!!!!!!!!!!!!!!!" 라고 외치고 있는 거다.

한국 사회에서 계급 갈등이 표출되는 방식이 주로 이러하다. 자신의 노동조건이나 계급으로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자는 방식으로 계급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본가들이 다른 계급의 사람들을 '무시'했을 때 공분이 폭발한다.

한진그룹의 조현민아 자매가 중간 관리직, 협력사의 임원들을 모욕했을 때, 대림 그룹의 이해욱이 운전 기사를 폭행했을 때 자본가들의 '갑질'에 대한 분노는 폭발한다.

반면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분노를 불러 일으키기는커녕 탐욕스러운 귀족 노조를 막기 위해 필요한 정상적 조치 수준으로 당연시된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계급 갈등은 전혀 계급적이지 않은 우발적 사건으로 표출된다.

이렇게 기생충은 한국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한국적인 영화다.

4. 그렇다면 기생충은 어떻게 세계적인 공감을 얻고 있나?

물론 봉준호 감독의 탁월한 각본과 연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점점 다른 세계도 한국처럼 변해가고 있는 영향도 있기 떄문이 아닐까?

노동조합의 중심이 됐던 제조업은 선진국에서 점차 파편화되고 아웃소싱이 널리 퍼지고 있다. 한 자리에 모여서 같은 일을 하며 연대감을 느끼는 방식의 노동이 사라져가면서 노동조합도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복지를 전적으로 개인의 능력 문제로 생각하게 만든다.

SNS를 타고 점점 확산되는 개인주의 문화는 연대를 구태의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한국의 빈자들은 기우처럼 상상으로만 가능한 신분상승을 꿈꾸며 무기력하게 고립되거나, 기택처럼 구조적 상황에 대한 분노를 우발적 개인 간의 갈등으로 폭력적으로 표출하는 두 가지 선택지에 점점 갇히고 있다. 구조적 현실에 대한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대응이다.

자본가는 더이상 조직적 저항에 직면하지 않는다.

기생충은 한국의 현실이고, (특히 서구의 엘리트들이 바라는) 서구의 머지 않은 미래일지도 모르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내 대부분의 영화 관련 글이 그렇듯이 기생충에 대한 영화적 리뷰라기보다는 기생충에 대한 사회학적인 에세이다. 보다 깊은 사회학적 분석을 보려면 지주형 선생님의 글을 추천한다.

http://moraz.egloos.com/4171660